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펠리페 2세 (문단 편집) == 후대의 평가 == 당시 스페인의 대외 강경책으로 대립한 정적들이 후대에 열강으로 부상한데다, 광신적인 종교적 열기에 따라 실제 탄압도 거세다 보니 적이 워낙 많아 스페인 국외에서는 후대에 걸쳐 시종일관 지독한 폭군으로 묘사되었다. 사실 스페인 내에서조차도 [[돈 후안]], [[파르네제]] 같은 당대의 걸출한 인물들이 펠리페의 견제를 받아야만 했고, 특히 [[잉글랜드]]에서는 [[청교도]]와 [[성공회]] 교인을 학살한 [[메리 1세]]의 남편으로, 국사의 서사시적 위치에서 [[나폴레옹]], [[히틀러]]와 함께 악마로 여겨졌고 [[영국]]의 영향이 워낙 컸던 [[미국]] 등지에서도 평가가 그대로 이어졌다. 게다가 말년의 정치적 스캔들로 인해 외국으로 망명한 안토니오 페레즈라는 펠리페 2세의 서기 또한 악소문을 많이 퍼뜨려 (안 좋은 의미로) 근세 유럽사에서 가장 주목을 많이 받는 군주가 되었다. 경제정책에 국한해서 보자면 명백하게도 당시 유럽 최강국의 군주라는 양반이 비서에게 국고 재정 서류를 두고 "솔직히 이게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시인하며 국가 파산의 상황을 4차례나 반복하는 모습은 재정, 회계적인 모습에서 오히려 [[암군]]이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신대륙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금과 은이 있었기 때문에 보였던 ~~오만함~~ 모습이다. 많은 파산과 실책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제국은 펠리페 사후 이후에도 유럽에서 압도적인 부자 나라로 유명했으며, 영국과 미국이 후대에 발흥하기 전까지 스페인을 무시할 수 있는 나라는 없었다. 펠리페 2세가 방만한 재정 운용으로 인해 까먹은 것도 많지만, 애초에 이 시대 자체가 근대 자본주의 한창 이전, 정치적, 종교적 권력이 경제력보다 훨씬 더 중요했던 시대였기도 했고[* 쉽게 말하면 "빚 못 갚겠으니 항의하려면 우리 스페인 테르시오 보병의 창 끝에 대고 항의하시오"란 논리가 통했던 시대였다는 말이다. 그리고 당시 스페인의 빚은 빚을 떼먹은 거 보다 스페인 제국이 제공하는 군사력, 외교적 동맹 네트워크가 무너지는 게 훨씬 더 위험해서 궁극적으론 을이 될 수밖에 없는 제노바, 스페인령 플랑드르 상인들에게 진 빚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말이야 이리 쉽지, 한 번 파산 선언할 때마다 당장 잘 나가던 공세도 한 방에 올스톱 되는 등 실제 피해도 막심했지만, 어쨌든 기본 군사력과 정치력만 어느정도 되면 국가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건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펠리페 2세가 다져놓은 내부 행정체계 덕분에 국가 파산 몇번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시스템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영미권과 종교는 같아도 스페인의 적이란 건 매한가지였던 프랑스 학자들이 주도했던 전통적인 서양 사학계에서는 펠리페 2세를 스페인 제국의 몰락의 시초로 보았으나, 현대에 와서 이러한 관점은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현대 학계에서는 '스페인의 몰락'이란 테제 자체가 도전을 받고 있고, 국제 열강이란 측면에 한정해서 '몰락'이란 모델을 계속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 기점은 펠리페 2세보다 한두 세대 더 뒤로 본다. 제정적인 측면에서 펠리페 2세의 치세가 스페인의 약점을 부각시켰다 하더라도, 당장의 국력과 국제적 영향력으로 17세기 초반의 스페인은 100년 전보다 훨씬 강하면 강했지, 꿀릴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대 자체가 군사혁명으로 인해 하루가 멀다고 폭등하는 전비와 루터파보다 한층 더 과격한 칼뱅주의가 대두하면서 유럽 전체의 정치 지형이 재편되어 가는 와중에 카를 5세 시절의 두루뭉술한 중세적 보편군주와 특정한 지정학적 기반 없이 전적인 동군연합만으로 운영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적 제국은 그 한계가 명확했다. 가령 카를 5세 시절 유럽의 종교적 분열은 그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어도, 잉글랜드만 하더라도 여전히 교회의 수장만 교황에서 왕으로 바꾼 상태였으나 16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제대로 국교회의 교리 자체를 뜯어고치며 대외적으로도 확실하게 범개신교권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전통적인 서유럽의 육상 패권 국가였던 프랑스는 부군 카를로스 시절 이탈리아 전쟁에서 두들겨 맞아 그 위상은 축소되었지만 여전히 무시못할 강력한 대국으로 군림하고 있었으나 국왕 [[앙리 2세]]의 어처구니 없는 사고사로 인해 내부로부터 곪아가던 종교 문제가 순식간에 폭발하면서 반세기에 가깝게 나라 자체를 [[위그노 전쟁]]이란 파국에 빠졌다. 이런 대국적 상황에서 펠리페는 일단 탄탄한 내부 행정 체계와 통치 구조를 가톨릭 교회의 세속적 비호 세력이란 이데올로기적 권력과 결합시켜 대대적으로 재편하면서 자국인 스페인과 범가톨릭권 내에서는 강력한 지도력을 확립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가톨릭 교회 내에서, 가톨릭 교회 중심의, 가톨릭적 관점에 따른 국가 건설과 국정 운용'''이란 전제 조건 자체가 해당 안 되는 네덜란드에서 이런 펠리페 2세의 추진력과 정치적 비전은 오히려 충분히 대화와 교섭으로 풀 수 있고, 실제로 스페인, 스페인령 이탈리아에선 그런 식으로 해결한 정치적 문제들을 오히려 더 불피우면서 장장 80년간 이어지며 결국 장기적으론 나머지 유럽사에선 심지어 그 서로 사이 험악한 잉글랜드와 프랑스도 일시적으로나마 손을 잡게 만드는 대재앙의 발단이 되었다. 그리고 잘 나가는 놈은 다구리 놓아서 팬다는 유럽사의 너무도 유구한 법칙에 따라 일단 네덜란드에서 생긴 지정학적 균열은 17세기 종국에는 스페인 패권 자체를 무너뜨리게 될 '''네덜란드+잉글랜드+프랑스+스코틀랜드+신성로마제국 내 개신교 구성국+모로코'''라는 무려 루터교, 성공회, 칼뱅교, 가톨릭 교회, 이슬람 5종파를 넘나드는 환상의 대스페인 동맹을 만들어 버렸다. 종교적으로는 펠리페 2세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가톨릭]] 세력의 반격이 상당한 성공을 이루어 [[독일]] 등지에서 [[개신교]] 세력은 그의 치세 말엽에는 슬슬 후퇴하고 있었고, [[지중해]]의 경우 비록 [[튀니지]]를 잃고 말았지만 레판토에서 오스만에게 한방 먹여줄 수 있었다. 그의 사후 범유럽 가톨릭 세력의 구심점으로서 스페인의 위치는 확고했으며, 그의 선대에 인정받아 성장하기 시작한 [[예수회]]는 이제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톨릭 신앙의 반격의 명실부공한 선봉에서 맹활약하고 있었고, 심지어 스페인을 대단히 경계하던 적국 잉글랜드의 제독이었던 노팅햄 경 찰스 하워드마저 그를 "기독교 세계의 최고의 군주"라 부르며 경외감을 표했다. 신대륙의 광활한 [[식민지]]에 대해서는 선대로부터의 [[콩키스타도르]] 약화책을 계승한 펠리페 2세 특유의 강고해진 중앙 집권과 관료제에 대한 고집으로 대대적인 행정 개편이 있었다. 그리하여 [[인디오]] 노예제를 폐지했으며 [[예수회]] 등 선교사의 대대적인 파견으로 피정복민에 대한 인도적 대안을 마련한 공로를 인정받기도 하며, 그에 더해 은 제련법을 비롯한 당대의 기술적 진보 덕분에 그의 치세 후기에야 드디어 신대륙의 엄청난 귀금속이 제대로 스페인 본토에 흘러들어오게 되었다. 아즈텍 정복, 잉카 정복 같은 신대륙에서 스페인 제국 성립 큰 정복 자체는 부왕 시절 이루어졌지만, 창업 못잖은 수성적 성과인 신대륙의 행정적 재구축과 장기 지배에는 펠리페 2세 시절 본격적으로 도입된 왕실 법원(real audiencia), 대대적으로 뜯어고친 부왕령 제도, 공무원 순환 밑 감사 제도(visitas)를 도입해 16세기 기술적 한계를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거리의 장벽을 극복하게 해준 각종 행정 개혁이 근간이 되었다. 그런 한편 카스티야와 역사 깊게 내려오는 라이벌 관계였던 포르투갈의 왕위와 국외 식민지를 넘겨받아 [[동군연합]]을 이루어 광활한 영토를 관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포르투갈과의 관계는 마치 예전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그러했듯이 실상은 독자적인 국론과 이해관계, 언어가 여전히 병존하는 상태였다. 표면적으로는 같은 왕을 모시지만 식민지도 제각각 나누어 경영하고 상호간에 간섭을 최대한 자제하는 형태였던 것이다. 펠리페 입장에서는 실질적인 통합을 더욱 추진하고 싶었지만, 포르투갈 내에서 아비즈 왕가의 사생아였던 안토니오나 모계를 통해 역시 아비즈 왕가와 이어져 있었던 라누치오 파르네제 등 다른 경쟁자들 중심으로 반대 세력이 이미 생겼으며, 포르투갈 현지 귀족들의 도움을 받아 이들을 꺾었어야 했던 처지 때문에 결국 포르투갈 또한 실질적인 통합이 아니라 동군연합만 이루어지는 형태로 편입되었다. 이게 펠리페 당시만 하더라도 스페인 입장에서는 영토를 추가하니 좋고,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여전히 실질적으로 독립 국가인 셈이니 손해볼 게 없었는데, 펠리페 사후 네덜란드와의 전쟁이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브라질과 아시아 무역항들로 확대되는 등 서로의 불똥이 튀기 시작하면서 이 애매한 정치적 관계 때문에 단적인 해결 또한 불가능해지면서 결국 포르투갈 독립 전쟁과 이베리아 연합의 붕괴의 단초를 제공하고 말았다. 동군연합이라는 느슨하고 애매모호한 형태의 통합이 가지는 한계 또한 명백해진 게 17세기 유럽이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건 이 동군연합 제국들 중에서도 가장 크고 강성했던 합스부르크 스페인이었는 건 자명한 일이다. 이런 면에서 동시대인들이 펠리페 2세를 좋게 보았던 정치적 여건과 가치관이 현대에서는 확고하게 단절된 가치관이란 점에서 펠리페 2세의 객관적인 평가는 힘든 면이 있다. 동시대적 관점에서 신실함이라 칭송받으며 외교적으로 범가톨릭권의 수장으로서 스페인의 지위를 굳혀준 종교성은 현대 와서는 신앙에 나라를 꼬라 박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세속주의적 실용주의 관점에서 결함으로 평가 받는다. 마찬가지로 현대에선 [[안도라]] 공국과 프랑스 같은 소국들의 예외적인 경우 빼곤 볼 수 없으나, 당시에는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동군연합]]이라는[* 실제로 [[크킹2]]를 보면 아주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 거지만, 중세 정치적 전통과 법률이 여전히 팔팔히 살아 숨쉬었던 16~17세기 유럽인들 대부분은 '자기 나라'의 군주를 '다른 나라'와 '''공유'''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단일 국체로 보는 프랑스의 예만 들더라도 [[브르타뉴 공국]]은 16세기 중반까지, [[나바라 왕국]]은 17세기까지 실질적 독립을 유지했고, 흡수 이전 토착 세력의 실질적 자치는 대혁명 이전까지 쭉 이어졌다.] 굉장히 미묘한 근세 유럽 특유의 다국적 정치 시스템 아래서는 법학자 솔로르싸노(Juan de Solórzano)의 표현처럼 "마치 나라마다 따로 군주가 있는 양"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를 군사적으로 확보한 이후 정치적, 제도적으로 통합하려고 했던 시도를 일체 하지 않았던 걸 정치적 지혜와 공명정대함으로 평가했지만, 국민 국가의 관점에선 이건 확장도 아니고 정복도 아닌, 남의 나라를 먹고 나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좋게 볼 수 없는 자질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는 창업보다 수성 군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더욱 체계적인 국가 통치 체제를 구축한 점에 있어서는 그도 충분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군주라기보다는 차라리 내각 책임자에 적합한 인물형으로, 만약 그가 왕이 아니라 총리나 장관의 위치였다면 오히려 더 큰 업적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당대의 군주 중 펠리페 2세만큼 전근대 유럽 국가의 영욕을 모두 겪은 군주는 없다. 한편으로는 외부를 향한 불관용과[* 이것도 16세기 유럽 군주라는 시선에서 보면 펠리페가 특별히 싸이코인 건 아니다. 현대인에게는 교회가 사회의 하부구조로 여겨지지만, 마지막 중세인들이라 할 수 있는 16세기인들에게는 '교회'와 '국가'는 동전의 양면 같은 구조였다. 똑같은 '카스티야인'이라는 집단이, 한편으로는 '카스티야 왕국'으로, 한편으로는 '카스티야 교회'로 나타나는 것이다. 펠리페이든 루터이든 칼뱅이든 간에, 여기엔 차이가 없었으며, 오직 개신교 내부의 극단파(재세례파 등)만이 예외였을 뿐이다. 칼뱅이 개혁을 외쳤을 때 그 개혁이란 당연히 '교회 공동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 혼자서 개신교 신앙 믿고 조용히 살면 모든 게 괜찮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가령 츠빙글리만 하더라도, 「'''츠빙글리에게 취리히 시와 취리히 교회는 사실상 하나였고 동체였다. ... 결국 시의회는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문제들에 개입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더 이상 올바른 성경해석에 관한 문제로 구애받지 않게 되었다. 시의회는 사실상으로 그들이 ㅡ 교황이나 공의회가 아닌 시의회가 ㅡ 취리히 시민들을 위해 성경을 해석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선언했으며, 이러한 권리를 행사할 의도가 있음을 알렸다.'''」{{{-2 Alister McGrath 씀, 최재건 번역, 《종교개혁사상》''Reformation Thoughts: An Introduction'')}}}] 내부 쇄신으로 [[종교개혁]] 이후 크게 위축되었던 [[가톨릭]] 신앙의 반격을 주도하는 한편 [[예수회]]를 꾸준히 진흥시켜 영향력을 강화한 반면, 그러한 배타적 종교성에 기인한 탄압으로 인해 스페인의 국운을 꺾은 가장 큰 단일 요소라 할 수 있는 네덜란드의 상실 및 잉글랜드와의 불화를 초래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네덜란드는 육군이[* 스페인이 자랑하던 [[테르시오]]를 붕괴시킨 [[선형진]]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잉글랜드는 해군이 보다 더 진흥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와 관련해서는 잘못된 정책으로 반란이 터지도록 동기 부여를 하면서, 또 스페인의 군사적 역량만큼은 여전히 유럽 최강 수준을 유지하여 반란을 일으킨 주의 과반수 이상[* 이 당시만 하더라도 네덜란드에서 인구도 많고 부유한 지역은 현대 네덜란드가 아닌 벨기에 지방, 즉 정치적 수도였던 브뤼셀, 알프스 이북 유럽 최대의 무역항이었던 엔트워프 등이었지만 막상 이렇게 스페인이 탈환한 지역들은 독립 전쟁 과정에서 다 파괴되어 버려 네덜란드의 세력 밸런스가 결정적으로 북부로 넘어가 버렸다.]은 탈환 및 유지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지켜낸 플랑드르에서도 전대에 비해 주민들의 반감이 더 올라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반면 아라곤과 포르투갈에서는 전통적인 정치적 형태를 존중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정치적 통합에 약진을 이루었는데, 또 그 종교적 열기는 어디 가질 않아 당시 발렌시아 지방 농민들의 다수를 차지했던 모리스코들을 탄압하여 대대적인 모리스코의 반란 또한 초래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무슬림]]들과 이단적 부류 역시 철저하게 발본색원 해 추방 및 제거함으로써 쓸만한 인재들을 잃는 부작용도 초래했다. 또한 프랑스와 대대로 이어진 적대관계를 풀고 겨우 화친을 맺어놨음에도 그 직후 일시적인 내분에 뛰어들어 이를 이용해보려다 후대에는 더 큰 적을 만들게 되었다. 훗날 프랑스가 [[30년전쟁]]에서 [[개신교]] 편에 붙은게 과거 스페인에 대한 국민적 앙금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이는 스페인이 [[가톨릭]]의 맹주를 점했다고 하나 역시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는 계속 이를 인정하지 않아 입지에도 악영향을 끼치는 결과를 냈다. 국외로 눈을 돌리면 신대륙 식민지 관리를 대대적으로 손보아 체계를 확실히 하는 한편, 비록 원주민들에게는 불행이었지만 [[필리핀]]에 총독을 파견하고 [[마닐라]]를 스페인의 태평양 기지로 삼아 대중국 무역을 더욱 효과적으로 이행하는 작업도 이룩했다. 펠리페 2세 치하 마닐라 건설로 인해 이전에는 발견해놓고 깃발 꽂아 놓은 수준에 불과했던 스페인 제국이 실제로 마닐라-아카풀코-멕시코 시티/베라크루즈-세비야로 이어지는 무역로로 단단하게 묶여진 거의 범지구적 경제, 무역적 실체로 성장했다.[* 포르투갈 동군연합 이후 명목상으론 이미 포르투갈이 다져놓은 아프리카 해안-인도양 루트도 차지하게 되었지만, 상술했다시피 독립된 무역망의 유지는 왕위 계승 협상 과정에서 포르투갈인들이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라 실질적으론 여전히 따로 별개의 무역 시스템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런 한편으로는 지중해 너머의 요충지인 튀니지를 오스만에 빼앗기고 상술한 모리스코 유민들의 복수심으로 인해 북아프리카 바르바리 해적들이 대전성기를 맞으면서 오히려 스페인 지중해 해안과 이탈리아 해안 도시들에겐 큰 재앙을 초래했다. 이러한 결과 스페인이 신세계의 엄청난 부를 벌어들였음에도, 스페인 자체적으로는 바로 그 신대륙의 부가 오자마자 플랑드르,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대금 지출하느라 바쁜, 얼핏보면 먼 훗날의 [[종속이론]]스러운 경제적 식민지 관계에 빠져버렸다. 당시 이런 스페인 정치경제의 난국을 그리는 전형적인 묘사가 "베라크루스에서 몇달이나 걸려 도착한 금은보화를 적재한 배들이 세비야 항구에 잠시 멈추자마자 바로 안트베르펜, 제노바로 가버리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베네치아]]와의 경쟁으로 지중해 상업 패권이 심각하게 약해진 제노바와 독일(푸거 가문 등)의 자본가들을 스페인 편으로 끌어들여 외교적으로는 범[[지중해]]적 가톨릭 동맹을 형성할 수 있었으나, 재정적으로 당장 쓸 수 있는 자금줄을 얻은 대신 스페인 자체적인 경제적 부흥이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일각에선 펠리페 2세는 종교적 불관용과 잦은 전쟁, 이로 인한 국력 소진으로 인해 [[무굴 제국]]의 6대 [[황제]] [[아우랑제브]]와 비교하곤 하는데, 따지고 보면 전혀 적절하지 않다. 일단 아우랑제브가 본인이 싸지른 수많은 전쟁과 반란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아들인 [[바하두르 샤 1세]]가 좀 어찌 수습하려고 하다가 픽 죽어버리면서[* 70대에 죽었으니 결코 요절은 아니다. [[찰스 3세|아버지 아우랑제브가 더럽게 장수한것]]일 뿐.] 무굴제국은 이미 벌려진 사방의 전쟁을 제대로 정리하지도 못하다 [[나데르 샤]]라는 걸출한 외적에게 후드려 맞고 순식간에 델리 밖으로는 통치력을 행사하지도 못하는 식물제국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조 스페인 제국은 펠리페 2세가 네덜란드에서 거하게 삽을 푸긴 했지만 그 사후에도 명실부공한 서유럽 최강 국가이자 세계제국으로 패권을 최대한 박하게 봐도 1659년 프랑스와 전쟁을 패전으로 마무리한 피레네 조약까지[* 이때 원래 중세 아라곤 왕국, 그리고 본토 스페인의 유일한 피레네 산맥 이북 영토인 로세요(스페인어: 로세욘, 프랑스어: 루시용)와 세르다냐(세르다뉴)를 빼았겼고, 이베리아 반도 본토의 땅을 빼앗겼다는 상징성 때문에 흔히 스페인 패권 몰락 기점으로 삼는 사건이다.] 유지했다. [[무굴 제국]]의 경우에는 [[마라타 연맹]]이 탄생하게 된 내부 반란의 위협이란 면에서도 스페인 또한 1640년대에는 카탈루냐, 포르투갈, 나폴리, 시칠리아, 밀라노 전역에서 반란이 터지면서 진짜 스페인 제국 자체가 한방에 공중분해될 위기에 처했으나, 기본적인 역량 자체가 다른 지방들하곤 차원이 달랐던 포르투갈을 제외하곤 소모된 시간과 자원은 막대했지만 결국 모두 하나 둘씩 재정복하는데 성공하면서 16세기처럼 독자적인 언터쳐블 원톱 패권에선 내려왔을 지언정 주요 열강으로서 면모는 여전히 유지했다. 그리고 네덜란드를 대표적으로 일련의 뼈아픈 실책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패권이 유지되는 데에는 펠리페 2세가 이룩한 내부 행정 개혁의 역할이 지대했던 만큼 아무리 봐도 내치란 측면에선 좋게 봐주기 힘든 아우랑제브와 펠리페 2세는 직접 비교가 불가능하다. 전장에 직접 안 뛰고 사무실에 처박혀 나라 다스리는 공무원 왕의 전형인 펠리페와 달리 평생 전장에서 치세의 영욕 모두를 겪은 아우랑제브는 차라리 카를 5세의 언럭키 버전으로 보는 게 더 적절하다.[* 게다가 그 아우랑제브 본인도 갈수록 마냥 종교적으로 불관용적이기만 했던 건 아니라는 관점이 더 주류가 되고 있다. 아우랑제브 종교 정책의 문제점은 펠리페 2세처럼 진짜 아예 전국적 강제 개종을 밀어붙히는 동시대 유럽의 교법화적 불관용이 아니라, 같은 종교인 무슬림을 비롯해 하필이면 지역 유지들과 귀족들의 특권과 권력을 마음대로 무너뜨리는 정치적 과오에 더 가깝다.] 종합하자면, 근대적인 국민국가는 커녕 근세적 절대주의 왕조 국가와도 거리가 먼, 합스부르크 가문의 중세적 사적, 종교적 보편제국에 가까웠던 당시 스페인 패권을 그나마 근대적 국가와 더 가까운 체계적인 행정 체계와 관료제 중심으로 돌아가는 스페인이란 확고한 중앙을 기반으로한 제국으로 개편하면서, 이 와중 내치에선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자국 내에서만 통하는 방식을 외부에서도 강압적으로 밀어붙히다가 큰 사고도 많이 친, 외치에선 상당한 실패를 겪은 군주라고 볼 수 있다. 업적 또한 확실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 업적들 또한 중대한 부작용, 실패한 이면이 따라와 상당히 극단적으로 치세가 영욕을 왔다갔다 한 편이다. 그에 대한 평가야 어쨌든 당대 유럽 최강국이었던 스페인의 군주인 펠리페 2세의 비중은, 적어도 서유럽사에 있어서는 부왕에 버금간다 할 만하다. 그래서 [[아돌프 히틀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다음으로 유럽사에서 관련 전기가 가장 많이 쓰여진 인물이다. 16세기 후반 유럽 최강대국 스페인의 영화와 영욕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긍정적인 면이든 비판적인 면이든 유럽사의 맥락 속에 그 위치와 영향력만은 큰 무게를 차지하고 있다.[* 일례로 현대의 [[미국]]에서는 이니셜의 나열로 KPCOFGS인 계문강목과속종의 명칭을 외울 때 King Philip came over from great Spain으로 외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